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강 방어선 전투 (문단 편집) == [[대한민국 정부]] 상황 == 28일 정부는 [[대전광역시|대전]]의 [[충청남도청]]으로 이전하였다. 이날 밤과 다음날 낮까지 [[서울]]을 탈출한 정부 구성원들은 대전에서 재건된 정부에 집결했다. [[이승만]] 대통령은 27일 새벽 4시 3등열차 2칸을 타고[* 이때 동승자는 영부인([[프란체스카 도너]]), 대통령과 영부인의 내외국인 비서관들, [[경무대]][[경찰서]]의 [[경찰서장]]과 경찰관들, 보건사회부 장관과 [[이기붕]] [[서울특별시장]]이었다.] 이날 9시 대구에 도착, 서울이 함락되지 않았다는 소식에 북향을 결정하여 12시 [[대전역]]에 도착했다. 이때 이기붕 시장은 북행은 너무 위험하다고 말렸고 마중나온 충남도지사는 북행을 찬성하는 가운데 미 공군이 참전한 소식을 듣고 대전에 정부를 재건하기로 결정, 충남도지사 사저로 향했다. [[신성모]] [[국무총리]] 서리 및 [[대한민국 국방부|국방부]] 장관은 27일 오후 [[수원역]]으로 피난갔고 부통령 [[이시영(정치인)|이시영]]은 28일 1시 [[김두봉]]이 보낸 특사의 협조 요청[* "이승만 대통령이 달아났으니 이제 당신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다. 김일성 수상과 즉시 정상회담을 하고 한국군에 즉시 전투중지 명령을 내리라"라고 요구했다고 한다.]을 거부하고 상황을 파악, 즉시 짐을 싸고 일가족과 한강다리를 넘었는데, 이때가 폭파 30분 전인 2시였다. [[대한민국 국회의장|국회의장]] [[신익희]]는 국회부의장 [[조봉암]]과 함께 대통령을 면담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곧바로 가족들을 데리고 열차 편으로 남하했다. 조봉암은 서울에 남아 다른 국회의원들의 피난 비용을 마련해주고 북한군에게 넘어가선 안 되는 공문서들을 소각한 후 북한군의 서울 진입 직전에 새벽차를 타고 서울을 탈출했다. [[조병옥]] 박사는 28일 오전 신사리 나루터로 간신히 도하에 성공했다. 이 밖에도 대부분의 정부 각료들과 국회의원들은 27일에 서울을 빠져나왔으나 [[김규식]], [[안재홍]], [[조소앙]] 등 유력한 정계인사들과 50여 명에 달하는 국회의원들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 했고, 결국 북한군에 의해 강제로 [[납북]]당했다. 정부는 이때 간신히 [[한강]]을 넘은 사람들에게서 서울에서 지하 공산당원들과 보도연맹 가입자들이 한국군 패잔병들과 경찰, [[공무원]]들을 솎아내 죽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듣고, 이들을 제거해야 후방이 안전하다는 판단을 내려 수원 이남 모든 지역에서 [[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|전국의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모든 좌익 성향 재소자들]]과 [[보도연맹 학살사건|보도연맹원들을 일제히 제거]]하라고 명령을 내렸다. [[대한민국 육군본부]]는 28일 오전 수원 국민학교로 이전했다[* 이때 정보국 문관 [[박정희]]는 한국군이 가장 불리하던 이날 28일 서울의 인민군이 아닌 [[수원]]의 육본으로 찾아가 충성심을 입증했고 현역으로 복귀, 소령 박정희가 되었다.]. [[대한민국 해군본부|해군본부]]는 [[한국은행]]의 [[금괴]] 후송에 협조한 후 진해의 통제부사령부에 전권을 임시 위임한 후 조직 해산 및 개별적으로 대전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. [[대한민국 공군본부|공군본부]]는 27일 23시쯤 [[여의도 비행장]]의 아군 비행기들과 함깨 대전비행장으로 이전했다. [[한국은행]]은 임직원들이 목숨을 걸고 서울 함락 직전까지 서울 본점 금고에 있던 정부 보유 금괴 1.1톤과 은괴 2.5톤을 대전을 거쳐 진해 해군요항부 창고로 가까스로 이송했다.[* 이 금괴과 은괴들은 전황이 더 악화된 8월 1일 미군 수송선 편으로 [[뉴욕]]에 있는 [[연방준비제도]] 금고로 이송되었다가 1955년 대한민국이 [[국제통화기금]]에 가입할 때 출자금으로 쓰인다.] 도쿄 지점에게 그곳에 있는 2,000만 달러 어치의 [[외환보유고]] 처분권을 전부 위임하고[* 당시 달러 처분권은 상공부 장관, 한국은행장, 외환국장등 약 10명에게 있었는데 법률 상 이들 중 한명만이 반출을 명령해도 집행해야 하는 구조라서 이들 중 한명 이라도 북한군에 체포되어 협조할 경우 피땀어린 2,000만 달러가 날라 갈 수 있으므로 북한군이 납치 못 할 도쿄지점에 위임한 것이다.] 그 후 대전지사로 철수, 임시본부를 세웠다. 임시본부를 세운 직후 유통되지 않은 채 서울 본점 금고에 보관되어 있던 105억 원 어치의 [[조선은행 원]] 발행물량과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 있던 조폐기를 폐기하지 않았음을 뒤늦게 파악하고 [[위조지폐]]를 이용한 북한의 경제교란을 막기 위해 도쿄지점을 통해 [[GHQ]]의 협력을 얻어 새로운 [[대한민국 원]] 은행권을 발행한다. [[우체국]]은 우정본부를 대전 우체국으로 이전했다. 그런데 당시 외국으로 송신이 가능한 전화와 [[전보]]기가 대전 우체국에 있는지라 곧 군의 관할하에 들어갔다. [[주한미국대사관]]과 미군사고문단은 27일 저녁 수원농업학교로 이동했다. [[맥아더]]장군의 미 전방 사령부는 28일 수원 농업학교에 설치되었다. 사령관는 처치 [[소장(계급)|소장]]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